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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채우는 공터...
투표 이야기가 나오면 대개 두 갈래로 나뉜다. "해야 한다." 혹은 "그거 해서 뭐하나?" 이다. 물론 세세히 분류하자면 더 많겠지만 대충 이 둘로 나눠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우선 "해야 한다."라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주장은 있지만 근거는 빈약하다. 반대로 "그거 해서 뭐하나?"라는 사람들의 말은 주장은 약하지만 근거에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나를 "그거 해서 뭐하나?"라고 하는 부류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해야 한다."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주장과 근거이다. 보통 사람들은 투표를 해야 하는 당위성으로 민주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것을 내세운다. 하지만 권리라면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의무라고 하기에는 강제성이 없다. 강제로 이행하게 하..
길이 있어야만 길을 갈 수 있다 생각했다. 지나고보니 내가 길을 만들었구나 거친 들판 지평선 위에는 길이 없었는데 뒤를 돌아보니 내가 지나친 대지 위를 따라 길이라는 것이 생겼더라 키 큰 풀 숲으로 걸어 들어갈 때는 앞을 볼 수 없어 두려웠는데 등을 돌려 지나온 곳을 보니 내가 길을 만들었더라 길이 있어야만 길을 갈 수 있다 생각했는데 내가 만든 길을 따라 사람들이 다닐 수도 있었구나.
방황한다는 것은 갈 곳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길이 많아 혼란스러운 것 뿐 네가 가는 길이 네 갈 곳과 맞 닿아 있는 지 의심하는 것이다. 어쩌면 모든 길이 네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가지 않은 길이라서 모르는 것이겠지 좀 더 편한 길을 찾으려는 것이라면 방황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정표 없는 갈림길에 들어선 것일 뿐 경로는 하나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하니까 그래서 방황하는 것이다 네가 가는 첫 길이기에
3년을 함께 한 동료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혼자 가는 것이 억울했는지 제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함께 나눈 열정을 몸 속에 품고 그렇게 홀로 떠나갔습니다. 울지 않으려 했습니다. 정말 울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절규하였습니다. 동료의 죽음은 절망이었습니다. 동료의 죽음보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함께 했던 열정의 열매가 모두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나는 기억합니다. 동료의 이름은 잊혀질 지언정 함께 나눈 결실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야동은 내놓고 가야지 HDD야...ㅠ_ㅠ 인터넷에서 HDD 장례식을 보다가 심심해서 낙서를...ㄷㄷㄷㄷ
금곡동 202번지에 위치한 한울 맛있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찾아가봤다. 원래는 고깃집이나 곤드레 나물밥 정식이 유명하다. 곤드레 나물밥 정식과 마늘 돌솥밥 정식 두 가지를 시켰다. 우선 간단히 상차림 사진. 우리 상이 아니라 옆 자리가 예약석인지 상이 이미 차려져 있길래 찍었다. 이따 밥 먹을 때 찍으려면 먹는 것이 늦어지니까...-_-; 귀찮으니까 그냥 사진만 나열하자. 사진을 다 본 후에 평가를 적도록 하겠다. 우선 보자.(참고로 사진에 나온 것이 전부가 아니다. 찍다가 귀찮아서...-_-;) 자...그럼 먹었으니 평가를 하자. 먼저 나물들이 대체로 심심하다. 약간 싱거운 것을 좋아하는 내게는 딱이었다. 하지만 두 가지는 짜서 먹기가 힘들었다.(뭐였는지 까먹었음...ㄷㄷㄷㄷ) 무엇 무엇이 나왔는지 지금..
사람들은 누구나 모순된 삶을 살아간다. 단지 스스로 그것을 인지하지 못 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 뿐이다.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돕자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은 가난한 나라에 구호금을 보내고 봉사를 다녀온다.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우리 사회에서 비싼 커피와 호화로운 음식을 즐긴다. 이것이 얼마나 모순된 행동인지 인지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인지하는 사람들 조차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신)을 경외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 단체나 기독교인들은 인간이 꾸며놓은 청계천을 좋아하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원을 좋아한다. 게다가 지금은 자연의 원래 장기를 뽑아내고 인공 장기를 심자는 4대강 사업을 지지한다. 그 중 그나마 이러한 자연을 훼손하는 ..
매무새라 할 수 있는 것을 굳이 "핏"이라 하고, 차이를 보이는 것은 항상 "틀렸다" 단정한다. 이 모든 것이 한글을 혐오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니, "에지" 있게 행동하라고 하면 "날"을 세우고 덤비기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상하리만큼 '선 성장, 후 분배'를 지지한다. 성장을 우선시하고 나중에 분배를 하자는 것과 분배를 통한 성장을 유도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우선 성장 후 분배를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박정희 시절에 바로 이런 '선 성장, 후 분배'를 맛보았다. 더 가까이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고인들에 대해 왈가불가 하는 것이 탐탁치는 않지만) 또한 '선 성장, 후 분배'라 할 수 있다. (현 정권인 이명박 정권의 경우는 이도 저도 아닌 아주 괴상한, 정말 참혹한 구조를 띄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IMF의 직접적 영향력에 들어간 상황이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어쨋거나 성장 위주의 정책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이명박 정권보다..
나는 교회를 다니며 우상을 숭배하지 말란 말을 자주 들었었다. 어려서야 그냥 뭐가 우상이다 하는 것을 곧이들었었다. 그리고 우상숭배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 했었다.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갔을 때 처음으로 성경을 완독했다. 한 번 읽어서는 잘 알 수가 없어서 몇 번이고 봤다. 그러면서 성경의 오류를 알게 되었고 그 오류의 원인을 나름대로 유추하게도 되었다. 많은 부분을 유추하고 논리적으로 재구성하려고 노력을 했었다. 그 중에 우상숭배라는 단어가 있다. 내가 본 성경에는(워낙에 개역도 많고 번역도 다 다르니) 우상숭배라는 것이 상징 자체를 뜻하는 것이었다. 즉, 소의 상이나 뱀, 혹은 부처를 신상으로 만든 것을 우상이라고 하지 않았다. 무엇인가에 상징을 부여하고 그 상징에 매어버리는 것을 우상..
사람들은 표준에 맞추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정상과 표준은 다른 말이다. 정상이라는 것은 어긋남이 없는 상태일 것이다. 표준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표준이라는 것이 비정상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표준을 쫓지 말고 정상이길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표준이 올바르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양심은 표준을 따르지 않고 정상을 향한다. 또한 양심은 대체로 표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표준을 벗어난 양심은 대개 올바르지 않은 경우이다. 올바른 것이 일반적일 때 정상과 표준은 양심이 되는 것이다. 나는 양심있는 세상을 원한다.(비록 나는 비양심적일지라도)
희안하다 (x) / 희한하다 (o) 나에 고향의 자랑 (x) / 나의 고향의 자랑 (o) 그렇지 안다 (x) / 그렇지 않다 (o) 않 그렇다 (x) / 안 그렇다 (o) 병이 낳다 (x) / 병이 낫다 (o) 그러는 것이 낳겠다 (x) / 그러는 것이 낫겠다 (o) 아이를 낫다 (x) / 아이를 낳다 (o) 네 말은 정말 어의가 없다 (x) / 네 말은 정말 어이가 없다 (o) 환골탈퇴 (x) / 환골탈태 (o) 풍지박살 (x) / 풍비박산 (o) 사던지 말던지 (x) / 사든지 말든지 (o) 얼마나 놀랍든지 (x) / 얼마나 놀랍던지 (o) 편지를 붙이다 (x) / 편지를 부치다 (o) 우표를 부치다 (x) / 우표를 붙이다 (o) 잘 됬다 (x) / 잘 됐다 (o) 잘 됀 (x) / 잘 된 (o) ..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완고해진다. 사람이 완고해지는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중 큰 영향을 미치는 것들 중 하나가 경험에 의해 쌓인 편견이고, 이와 비슷하게 나이가 들면서 정립된 신념이 아닐까 한다. 사람은 살면서 문제의 대처 방법, 삶의 방향, 양심의 기준을 만들어간다. 신념이라는 것은 이러한 문제의 해법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누구나 해법은 있지만 누구의 것이 좋다는 것은 쉽게 증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여러 사람의 해법을 통해 자신의 공식을 만들어간다. 그러고 나이가 들면서 그 동안 모아온 정보를 가지고 자신이 만든 공식을 정리한다. 이 정리된 공식은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매우 견고하게 구성되어진다. 그래서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습성이 생기게 되고 다름조차 틀림으로 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