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채우는 공터...

20121118 - 내가 채식을 지속하는 이유 본문

낙서장

20121118 - 내가 채식을 지속하는 이유

그냥보기 2012. 11. 19. 00:54

채식을 시작한 대단한 계기는 없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 철학과 맞아떨어지는 어떤 행동의 시작이었다.


처음 채식을 시작한 계기를 굳이 꼽자면 우리 주변을 장악한 육식문화에 대한 두려움같은 것이었다.

어렸을 적 고기를 좋아했기는 하지만 언제나 식단은 채식 위주였다.

고기를 먹는다고 해도 채식이 주를 이루고 고기는 곁들여지는 문화였다.

그러나 대학을 지나면서 먹는 것이 대부분 육식으로 전환되었다.

어디서나 간편하게 사먹을 수 있다는 것과 채식 식단들이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기때문에 귀찮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보다 더 큰 이유를 들자면 집에 있는 시간보다 학교나 친구들과 어울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는 이유일 것이다.

아무래도 집에 있다보면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을 먹게 되고, 어머니라 하면 자식에게 좋은 것을 먹이기 위해 고기를 주더라도 채소와 과일 등을 함께 제공해주지 않겠는가?

그러니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나 우리 사회는 점점 개별화되어 가면서 밖으로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야식 문화도 간단하게 시켜먹을 수 있는 닭, 족발, 피자 등등 육류 위주가 되었다.


주위 어느 곳을 가도 육식을 권장하는 식당이 즐비했지만 채식을 내세우는 곳은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게 어떤 지배를 받는 것같은 두려움을 안겨주었고 알 수 없는 반항심에 육식을 근절해보기로 마음 먹게 되었다.

처음에는 영양을 생각해 줄여보기로 생각했지만 줄인다는 것이 단절시키는 것 보다 더 힘들게 느껴졌었다.

그래서 아예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실행하기에 더 수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한고로 육식을 멀리하고 모든 음식을 과채류와 견과류 등등 생명을 해하지 않는 것을 기본 바탕으로 채식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채식을 하면서 내게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첫 째로 적정치를 초과한 몸무게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대학 때는 고기를 많이 먹어도 워낙 놀이로 운동을 많이 하다보니 살이 찔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대학을 마치고는 웬만해서는 놀이로 운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따로 계획하여 하지 않는 한 운동이라는 것을 하지 않으니 먹는 것이 다 살이 되고 부담이 되었다.

그런 몸이 채식을 시작한 이후로는 먹는 양을 줄인 것도 아니고 따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살이 점점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몸이 야위어가거나 엄청난 체중감량 효과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몸이 자연상태일 때 건강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돌아온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줄어든 몸무게의 영향도 있겠지만 몸의 신진대사가 원활해지고 체력이 증진하고 근력이 보강되는 효과가 부가적으로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원한 변화도 아니지만 이러한 변화도 있으니 한 편으로는 채식을 지켜나가는데 있어 쉽게 제시할 수 있는 핑계거리가 생긴 것이다.

어쨋거나 정말 중요한 변화는 세상을 바라보던 나의 철학이 음식 섭취에도 녹아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을 설명하기는 우리 사회가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못해서 누군가 왜 채식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그냥 건강에도 좋고 생명도 해치지 않을 수 있고 환경에도 도움이 되기때문이라고 얼버무린다.

이 부분을 글로 남겨두는 이유는 나중에 내가 의미를 혼동하지 않기 위함이 첫 째요.

누군가 정말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정도 정리된 내용을 보여주기 위함이 둘 째다.


그렇다면 내 철학과 합치를 이룬 음식 섭취에 있어서의 채식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권력에 대한 저항이다.

육식과 채식이 권력과 저항이라는 단어와 어떻게 부합하느냐 하는 것은 간단히 설명하기 힘들 것 같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육식이라는 문화가 내게 어떻게 보여지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육식문화라는 것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든간에 그 육식을 위해서 우리는 수 많은 땅을 희생해야만 한다.

그 수 많은 땅의 수 많은 생명체와 수 많은 나무와 수 많은 터전을 희생해야만 한다.

아마 잘 다듬어진(?) 땅에 사는 우리네 문화는 이것을 납득하지 못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희생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도 애써 외면하기 바빴을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들의 노동과 생명으로 커피와 초콜렛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어떤 다큐멘타리를 통해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물론 나도 초콜렛을 좋아하고 카페라떼를 좋아하여 즐기고는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초콜렛과 카페라떼를 줄이고 가능하다면 공정무역이라던가 생산자 자체에게 그 댓가가 가능한한 제대로 지불되는 방법을 택한 회사의 상품이나 가게를 이용하는 정도이다.

이와는 달리 육식문화에 있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자명하였다.

초콜렛이나 커피는 그것을 대체해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다른 상품을 살 수 없었지만 육식으로 인해 희생되는 것들을 보호하고 육식을 누리는 권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단지 육식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그러면 축산농가나 육류 생산자에게 좋지 못한 것이 아니냐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피해자도 아니며 더더욱 착취당하는 부류도 아니다.

우리가 먹는 육류는 거대 자본에 의해 움직이다.

그들은 더 많은 육류를 제공하고 퍼트리기위해 땅을 사들여 파괴한 후 그곳에 가축을 키우고 가축을 위한 사료를 재배한다.

사료를 재배할 땅에 곡식이나 과채류를 키운다면 현재 기아에 허덕이는 많은 나라의 국민들을 살릴 수 있다.

빈곤에 빠진 나라에 부족한 식량을 채울 수 있고 세계 어느 곳에서도 굶는 이가 없도록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곳에 육식문화를 위한 제국을 건설했다.

더더욱 기가 찬 것은 그 땅들이 모두 빈곤에 처한 나라에 속했다는 것이다.

이는 육식문화가 지배하기 위해서(좀 더 현실적으로 얘기하자면 금융 권력의 상층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난한 나라들의 식량 생산지를 가축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길러진 가축들은 탐욕스런 문화의 먹이가 되고 다시 쓰레기를 배출하고 그 쓰레기들은 다시 가난한 나라, 약소국에서 처리를 한다.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들의 살과 피를 내어줘야 하는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들.

그것이 육식문화의 본질이다.


채식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살과 피를 취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이는 내가 지향하는, 권력을 위해 희생되는 약자들의 해방과 맞물린다.

모두가 배를 곯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다시 육식을 곁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육식이 가난한 이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생활을 더 피폐하게 만들며 터전을 앗아가는 기간에는 나는 육식을 할 수 없다.

그것은 내 철학에 위배되는 행동이고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누군가를 짓밟고 있다.

한 문화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권력자로 군림하기도 한다.

그것을 모를 때에는 그 죄를 묻기 힘들지만 그것을 깨달았다면 그 죄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금융이 인간을 계급화하고 억압하는 세상.

육식문화는 그 사회의 식문화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