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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산문

20110701 - 죽는 날

그냥보기 2011. 7. 1. 00:31



누구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봤을 것이다.

나는 내 생일에는 무관심하면서도 내가 언제 죽게 될 지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관심이 많다.
또한 어떤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너무나 궁금하다.
언젠가 죽는 다는 것은 매우 공포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죽는 날을 학수고대 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 하겠다.
사실 죽고 싶다면 당장에 옥상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고, 자신의 심장에 칼침을 넣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어찌되었건 내 관심사 중 상당 부분은 이 죽음에 관련이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죽는 날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 전에 우리의 죽음은 정해진 것인지 우연한 사고인지 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죽음이라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물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필연적이든 우연적이든 운명이라고 단정지어야 하겠지.
하지만 각자의 죽는 날이 언제인지도 반드시 정해진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왜 사람들은 그 날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여길까?
그러면서도 모순되게 자신이 우연적 사고에 의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걱정한다.
예를 들면 차에 치인다거나 물에 빠지는 경우 등.
그렇다면 정해진 기간이 사고에 의해서 변동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우연적 사고가 우리의 운명적 사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 운명적 날이 우연한 사고를 가장하여 찾아 올 수도 있으니까.

만약 운명의 정해진 날과 방식을 알고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 정해진 방식과 정해진 시간 이전에는 매우 과감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거친 모험도 즐기고 몸을 날려 위급한 사람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하면서 위급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위의 전제를 역행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자신이 어떻게 죽을 지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 사람이 그렇게 죽을 운명이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사람이 그렇게 죽을 운명이 아니라면 굳이 내가 몸을 날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일로 죽는 것이 아니라면 내 행동은 과감한 것도 위험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신체가 손상될 위험은 있지만 생명에 국한해서 이야기 하자면 말이다.
게다가 자신이 어떻게 죽을 지와 언제 죽을 지를 안다면 "과감하다"라는 단어는 그 쓰임새가 줄어들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신비로움과 괴기스러움의 집합체인 것 같다.
우리는 그것을 공식화할 수 없다.
비록 사고를 당하지 않을 경우의 기대 수명은 계산할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실제 죽는 날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변수가 적용되어야 하는데 그 변수를 정의내리는 것 조차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누군가 실제로 그 죽는 날을 계산할 수 있는 방정식을 만든다면 나는 그 사람을 증오할 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를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주지도 못 하거니와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닌 폐기되기를 기다리는 부품처럼 여겨지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죽는 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다.
정녕 우리가 스스로 죽는 날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왜 모든 생명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
죽는 날이 소멸될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가 소멸되는 것 대신에...